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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4> 러시아 정교회학교 최초의 한인 학생이 된 최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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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영숙 항일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문영숙 이사장

[문영숙의 꼭 알아야 할항일독립운동 최재형/CTN]다음 날부터 식구들 모두 새벽부터 이러나 밤늦게까지 땅을 파고 밭을 일구었다.

아버지의 얼굴엔 날마다 새로운 기쁨이 넘실거렸다.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를 얻은 새로운 삶. 내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아버지를 활기차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형이 밭을 일구면 재형은 할아버지와 함께 돌과 나무뿌리를 골라냈다.

한인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 자식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한인들의 뜨거운 교육열은 서당을 열고 천자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러시아 당국에서도 늘어나는 한인들을 러시아화 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 학교를 설립했다. 수업은 러시아 어로 진행되었고 모든 교과 내용도 러시아에 관한 것이었다.

정교회 학교에서 한인 자녀들을 모집하였는데 한인들은 대부분 응하지 않았다. 한인들은 러시아 식 교육도 맘에 들지 않았고, 우선은 일손이 부족해 아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듬 해 봄, 재형의 아버지 최홍백은 힘들게 일군 밭에 씨앗을 뿌린 후 식구들에게 말했다.
"드디어 우리가 일군 우리 밭에 첫 씨앗을 뿌렸다. 알찬 열매를 맺으려면 그만큼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라. 이제 재형이를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재형은 아버지의 말에 깜짝 놀랐다.
"러시아 정교회 학교요?"
"새로운 땅에서 적응하고 살려면 이 나라 말을 배워야 한다. 아라사 말을 가르친다고 안 보낸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재형이가 정교회 학교 첫 한인 학생이 될 테니 애비 말 명심하고 학교에 가서 열심히 배우도록 해라."
재형은 아버지의 말에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버지, 아라사의 학교에 조선 선생이 있어요?"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라사 땅에서 살아가려면 아라사 사람한테 아라사 말을 배워야지. 아라사 말도 열심히 배우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열심히 배우거라."

재형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말에서 새 세상을 꿈꾸는 게 역력하게 보였다. 다음 날부터 재형은 러시아 정교회 학교의 최초 한인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학비를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계봉우가 작성한 아령실기 교육란에 최재형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계봉우는 이 글에서 빈한하게 고생하며 공부한 대표적 인물이 최재형이라며 아래와 같이 밝혔다.

빈곤하기 때문에 취학하기 불능한 사실의 일례를 든다면 최재형 씨의 유시 (幼時) 고학한 것이 실증이 되었다. 그가 러시아 학교에서 수업할 때에 그 빈한함이 뼈에 사무쳤는지, 굿을 하는 집에 가서 떡 조각을 빌어먹어 허기를 채운 일도 있었고, 삼동 (三冬)이면 양말과 신이 없어서 짚단을 가지고 눈 위를 걸어 다니다가 그 짚단을 펴고 꽁꽁 언 발을 녹였다고 한다.

-박환 교수 저 『시베리아 한인 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중에서 발췌 -

재형이 학교에 다니는 사이 재형의 형은 결혼을 했는데 형수는 재형을 심하게 구박했다.

심지어 일을 하지 않는다고 밥은커녕 누룽지도 아깝다며 밥을 굶겼다. 재형은 겨우 누룽지로 끼니를 때우고 학교에 가야 했으니 공부시간에도 늘 배가 고파 허기가 졌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디서 북소리가 나면 굿 당이 열린 것을 알아채고 아무리 멀어도 뛰어가서 떡을 얻어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최재형은 정교회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생각도 나날이 깊고 넓어졌다.

조선은 러시아 땅에 비하면 손바닥 전체에서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이 사는 지신허는 러시아 땅의 한 귀퉁이에 찍힌 점과 같은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최재형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포시에트라는 바닷가에 가면 배를 가지고 세계를 돌며 장사를 하는 상선들이 많이 있고, 그곳에서 심부름만 해줘도 밥을 굶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는다.

날마다 허기와 싸워야 하는 처지에서 그 소문은 어린 최재형에게 가출을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있으켰을 것이다.

최재형은 친구 둘과 함께 가출을 결심한다. 집을 나서는 날 바닥이 보이는 누룽지 그릇을 내미는 형수에게 그 그릇을 집어 던지고 집을 뛰쳐 나온다.

그러나 당시 허허벌판에 길이 있을 리 없다.

최재형은 친구들과 셋이서 황무지를 가로질러서 무작정 바닷가를 찾아간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들판에서 하루 밤을 보낸 친구들은 산짐승과 들짐승의 우는 소리에 겁을 먹고 집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최재형은 형수에게 누룽지 그릇을 집어 던지고 나왔으니 구박을 더 받을 수 밖에 없어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결국 허기 진 몸으로 사흘 밤낮을 걸어 포시에트 바닷가에 도착한 최재형은 그대로 실신해서 쓰러지고 만다.

그러나 어린 소년의 도전과 용기는 앞으로의 삶을 180도로 바꿔놓는 전환점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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