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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3>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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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숙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문영숙 이사장

[CTN]<3> 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그는 누구인가?

-낯선 땅, 낯선 하늘
두만강 건너 러시아 땅은 드넓고 비옥했다. 아버지 최홍백은 젖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쉴 틈도 주지 않고 바삐 서둘렀다.
"어서 가자. 여기는 아령(러시아) 땅이지만 조선에서 이곳까지 군사들을 풀어서 월경자들을 잡아간다니 아직은 안심할 수 없다. 어서 서둘러라."

재형은 이처럼 넓은 땅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경원 땅에서는 눈만 뜨면 깎아지른 산봉우리와 마주했는데 이곳은 어디를 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파 쓰러질 것 같으면, 잠시 길가에 앉아 쉬다가 금세 일어나 다시 걸었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사위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최홍백은 구릉 아래 아늑하게 들어간 곳에 짐을 내려놓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마른 풀을 깔고 이불을 꺼내 덮었지만, 거칠 것 없는 평원을 달려온 밤바람은 살 속까지 파고들었다. 어디선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재형은 할아버지 곁에 누워 말했다.
"할아버지, 냄새 때문에 토할 것 같아요."
"아마도 예 어디쯤에서 죽은 들짐승이 썩는 게로군."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형은 할아버지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이튿날 새벽, 재형은 추워서 눈을 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벌써 일어나서 짐을 짊어지고 길을 나설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앞에 뒤엉켜 있는 독수리 떼가 보였다. 최홍백이 장대를 휘둘러 독수리 떼를 훠어이 훠어이 쫓았다.

거무스름은 물체들이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던 최홍백이 갑자기 소리쳤다.
"오 세상에! 이런 끔찍한!"
재형도 검은 물체 쪽으로 뛰어갔다.

사람이었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난 것 같았다. 살림도구가 어지럽게 나뒹굴고 살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삽과 괭이를 꺼내 흩어진 인골을 한데 모아 땅을 파고 묻어주었다. 재형은 너무나 끔찍스러워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고향으로 돌아가요. 무서워 죽겠어요."
재형의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우린 이제 돌아가도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가 강을 건넜다는 소문이 마을에 다 퍼졌을 게야. 그러니 우리는 아라사 땅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먼저 강을 건너온 사람들을 만나야 해. 머뭇거리다가는 우리도 저 꼴이 된다."

재형은 아버지의 말에 등골이 오싹했다. 하루라도 빨리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야 했다.

걷고 쉬고 또 걷고 또 쉬면서 두만강을 건넌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아스라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이 보였다. 재형의 아버지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저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입니다. 밥 짓는 연기가 틀림없어요."
집을 떠난 후 제대로 밥을 먹어본 지가 언제인지 몰랐다.

움막 같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강을 건너와 터를 잡은 사람들이 틀림없었다.

집처럼 보이던 곳들은 토굴을 파고 나뭇가지로 지붕을 얹은 곳이었다.

돼지우리나 다름이 없는 토굴은 방도 부엌도 구분이 없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엮은 발을 늘어뜨려 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마을 이름은 지신허라고 했다.

- 조선사람이 처음으로 터를 잡은 지신허 마을
지신허는 1863년 봄, 함경도 무산에 사는 최운보와, 경흥에 사는 양응범이 두만강을 건너와 최초로 살기 시작했다.

1869년경에는 무려 6,500여 명의 함경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넜다고 전해진다.

계봉우가 작성한 <아령실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마을엔 의지할 만한 변변한 집도 없고 양식도 없어서 형용할 수 없는 굶주림과 추위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연해주 군무지사인 푸루겔름은 자신의 권한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창고에서 4,000 푸드의 저질 보리와 2,000 푸드의 밀가루를 풀어서 빈곤한 한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 해에도 상황은 더 심각했다. 얀치혜, 포시에트, 지신허에 이르는 길 가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있었지만, 그들은 월경죄 때문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최홍백은 어디에 터를 잡아야 할지, 또 다른 곳을 찾아가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여기 말고 다른 곳엔 조선사람이 없습니까?"

긴 장죽을 문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살기 힘들다고 청나라 배를 빌려 타고 추풍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소. 그들은 추풍에 닿기도 전에 배가 암초에 부딪쳐서 수십 명이 물귀신이 되고 말았소. 이곳은 늪지대가 많아 지리를 모르고 무작정 나섰다가는 독충에 물릴 수도 있소. 그러니 우리처럼 러시아 군인들이 거처하던 토굴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요. 또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러시아 병사들이 파 놓았다는 토굴은 어디 쯤에 있습니까."

노인이 재형의 가족을 안내했다.

노인이 안내한 곳은 덤불이 우거져서 겉으로 봐서는 토굴인지 아닌 지 알 수도 없었다.
"여기 잡풀을 걷어내면 그런대로 거처를 마련할 수 있을 거요. 우리가 사는 곳도 바로 이런 토굴이었으니까요.'

최홍백은 짐을 내려놓자마자 토굴 입구에 우거진 풀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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