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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1>항일독립운동가 최재형,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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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영숙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 문영숙 독립운동가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꼭 알아야 할 독립운동가 최재형/CTN]어느덧 광복 76년이 되었다. 국내와 국외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며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떳떳하게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선열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일이 곧 애국의 길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잊혀진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가 바로 최재형이다.

-소작농의 아들에서 글로벌 청년으로
최재형은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근과 굶주림을 참을 수 없어 아홉 살에 아버지 최홍백을 따라 연해주로 이주했다.

최재형은 한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열한 살에 가출을 한다.

러시아 극동의 항구 포시에트 바닷가에 허기져 쓰러진 최재형을 구해준 사람은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하는 러시아 선장이었다.

최재형은 선장 부부의 극진한 사랑으로 11세부터 17세까지 6년 동안 세계를 돌며 무역과 상술을 배우고 세계의 지리와 정세를 익힌다.

특히 선장 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중국어, 세계의 문화와 교양까지 특별한 사랑으로 교육을 시킨다.

청소년시기 최재형에게 6년 동안의 항해는 최재형을 글로벌 청년으로 환골탈태시킨다.

-유창한 러시아 어로 한인들의 페치카(난로)가 되다
영국이 동아시아에 세력을 확장하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동방을 정복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도시 이름도 블라디보스토크라 짓는다.

러시아 어로 블라디는 '정복하다'이고 보스토크는 '동쪽'이다.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각종 도로공사, 건축공사, 식료품 및 공산품 생산까지 일자리가 폭주하게 된다.

한인들의 노동력도 급증한다. 그러나 한인들은 러시아 인부에 비해 대우가 형편없었다.

최재형은 통사(통역) 일을 하면서 한인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준다.

기록에 보면 최재형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신분이 천민출신이니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한인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대변하고 도와주는 최재형을 존경하면서 초상화를 걸어놓았고 최재형의 애칭을 난로라는 뜻으로 페치카라 불렀다.

-동양의 카네기라 불리던 자산가에서 러시아 얀치혜의 도헌(군수)가 되다
최재형은 군납회사를 차려 군인들을 상대로 엄청난 부를 축척한다.

유창한 언어로 한인들에게 알맞은 일을 알선해주고, 한인들의 삶이 윤택해지도록 지도력을 발휘한다.

한인들은 최재형을 믿고 따르면서 점차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최재형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 한인마을의 노야(촌장)를 거쳐 드디어 얀치혜 남도소의 도헌(군수)가 된다.

-니꼴라이 2세 대관식에 한인대표로 초정받고 러시아 한인 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운 교육가
최재형은 러시아 사회에서 신망 받는 행정가로 니꼴라이 2세 대관식에 한인대표로 초청되고 황제로부터 예복을 하사받는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에도 힘써 한인마을마다 32개의 소학교를 세웠고, 그가 세운 한인학교는 러시아에서 우수학교로 지정되기도 한다.

최재형은 자신의 월급을 은행에 넣어두고, 그 이자로 소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도시로 유학을 보냈고, 유학을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와 소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게 했다.

- 러일 전쟁 참전후 연해주 독립단체 <동의회> 총장으로 대한의군의 무장과 의식주를 지원하고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도운 항일독립운동가
러일 전쟁후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고종은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명의 밀사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해산시킨다.

최재형은 간도관리사 이범윤과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 국내에서 망명한 안중근과 함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고 군자금으로 1만 3천 루블을 내고 러시아 공사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에게 1만 루블을 주어 최재형을 찾아가게 한다.

최재형의 집에서 결성된 <동의회>는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 서기 백규삼, 우영장 안중근이 핵심인물이었다.

1909년,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최재형은 안중근과 이강과 함께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모의하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는데 주도적으로 돕는다.

-대동공보, 대양보, 권업신문 사장으로 언론가에 권업회 회장으로
안중근 하얼빈 의거 이후, 대동공보가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자 최재형은 대양보 사장에 이어 1911년 권업회를 만들어 회장을 맡고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권업이라는 말은 일자리를 알선한다는 의미였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감시를 피해가기 위한 이름이었고 실제로는 항일독립단체였다.

- 전로한족대표자대회 명예총재로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
최재형은 1919년 전로한족대표자 대회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19년 3월 17일 의회정부를 표방한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고 최재형은 외교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 중 이동휘, 최재형, 문창범까지 무려 세 명이나 참여했다. 최재형은 재무총장이었다.

1920년 4월 4일,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에서 '4월참변'을 일으켰다.

이때 러시아 장군들과 함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붙잡혀 총살을 당했는데 최재형도 4월 7일에 일본의 총탄에 순국했다.

현재까지 최재형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 수 없고 일본도 밝히지 않고 있다.

최재형 선생은 기업가로, 한인들의 페치카(난로)로, 한인들의 교육자로, 독립운동가로, 언론가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거대한 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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