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합/사회

숭의사 정문 '둥근 원'의 비밀이 풀렸다

반응형

- '충신과 열사의 상징으로 태양과 같이 뜨겁고 빛이 난다'

 

숭의사 정문 '둥근 원'의 비밀이 풀렸다

[사회/CTN]한성진 기자 = 숭의사(충남도문화재 300호) 정문 둥근 원의 비밀이 풀렸다.숭의사는 소주가씨 중시조 3대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충효의 본당이다.이 같은 숭의사는 다른 사당과 다르게

www.ctnews.kr

숭의사 전경/사진=충남서북권역문화재돌봄센터 제공

[사회/CTN]한성진 기자 = 숭의사(충남도문화재 300호) 정문 둥근 원의 비밀이 풀렸다.

숭의사는 소주가씨 중시조 3대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충효의 본당이다.

이 같은 숭의사는 다른 사당과 다르게 정문에 둥근 흰 원 문양이 특이하다.

이에 관계자와 관광객은 물론 문화해설사도 흰 원의 문양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궁금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숭의사에서 지난 2009년 중시조 가유약 장군의 3대가 보여준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2충1효전국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는 가금현 CTN신문 대표가 지난해 작고한 아버지가 2007년 모 신문 A 객원기자와 인터뷰에서 밝혀 기사화 된 내용에서 그 비밀이 풀렸다.

그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1988년 8월 30일에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지정되면서 숭의사로 불리게 되었다.

본래 조선 철종2년 (1851년)에 가유약, 가상의 충성심과 가침의 효성을 기리기위한 이충일효(二忠一孝)의 불천지위(不遷之位)사우(祠宇)로 정문과 사당을 하사받았다.

사당의 정실(正室)안에는 가유약, 가상, 가침 세 사람의 신주를 모신 감실이 있다.

숭의사의 정문은 흰 원이 그려진 중문과 양쪽에 태극문양이 있는 동문과 서문이 함께 있는데 가운데 문에 그려진 원은 ‘충신과 열사의 상징으로 태양과 같이 뜨겁고 빛이 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사당의 가운데 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은 드나들 수 없고 제사에 쓰는 물건들만 통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동문(오른쪽)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와야 한다고 가재남씨는 자세히 설명했다.

위 내용에서 둥근 원이 의미하는 내용은 '충신과 열사의 상징으로 태양과 같이 뜨겁고 빛이 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금현 대표의 아버지 가재남씨가 살던 집에 걸려 있는 숭의사 관련 인터뷰 기사/CTN 한성진 기자

당시 보도된 신문은 액자로 표구, 가 대표의 고향집 즉 아버님이 살던 집에 걸려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현재 숭의사는 충남서북권역문화재돌봄센터에서 관리가 이뤄지고 있다.

[2007년 10월 26일자 기사전문]
벽을 허물고 통 크게 하나 되는 땅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 숭의사.

누에는 사라지고 마을 앞바다에는 기업도시가 들어서고 있다.

그 마을 중심에는 소주가씨의 시조를 모신 숭이사가 있다.

가씨는 아무리 새로운 성씨가 늘어난다 해도 항상 출석부 1번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본관인 소주는 중국 장쑤성의 쑤저우(蘇州)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떻게 중국성씨가 뿌리내린 것일까. 태안군 남면 양잠리로 가면 그 비밀이 풀린다. 양잠리는 최근 기업도시 건설로 들썩이는 부남호주변 간척지들과 맞닿아 잇는 마을이다.

말하자면 현대건설이 유조선을 들이대 완성한 희대의 간척사업으로 인해 바다를 빼앗긴 마을이다.

손님이 오면 안사람에게 물을 끓이라 한 사이 갯벌에서 낙지 몇 마리 뚝딱 건저 올리던 실한 바다밭이 양잠리의 안마당였다.

"여가 말하자면 수산물종묘센터였어 숭어, 민어, 갑오징어 모두다 여기서 새끼를 쳤으니께" 양잠리에서 평생을 살아온 가재남씨의 말이다. 그는 바다가 막히니 살길도 막막해져 마을 사람들 40% 가까이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갯벌이 논이 된 지금은 올 한해 가을걷이가 끝나면 골프장 가득한 소위 명품 도시가 들어선다고 떠들썩하다. 갯벌을 메운 땅에 도시가 그것도 100층짜리 초고층 빌딩을 렌드마크로까지 세운다니 어마어마한 토사가 필요할 것이다.

결국 가장 가까운 양잠리의 산들이 깎여나가 고스란히 그 바닥에 묻힐 뻔 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양잠은 외잠과 내잠이 합쳐진 이름이다.

가재남씨는 본래 누에 잠(簪)자를 쓰던 것을 일제시대 잠길 잠(潛)자로 바뀌었다고 개탄한다. 본래 바다를 향해 흘러내린 산줄기 끝이 누에부리처럼 생겨서 부쳐진 이름였다.

누에는 비단으로 인간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기 때문에 태양의 심부름꾼으로 여기던 천충(天蟲)이다.

신성한 하늘벌레가 마을 이름 속에서 사라졌으니 그 땅이 개발공화국의 대표적인 시험무대가 된 것은 예견된 일 였을까? 누에부리 같은 야트막한 구릉이 바다와 만나던 땅은 적돌이라 불렸는데 마을사람들에겐 양잠보다 친근한 이름였다.

지금은 부남호로 막혀버린 곳으로 흘러내려오던 옛 갯강의 이름이 적돌강이다.

적돌강이 바다와 통하던 시절 인근 남면초등학교에서는 적돌 애들이 최고 멀리서 최고 먼저 등교 했었다고 한다.

그 바지런한 적돌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뛰여 놀 던 곳이 바로 숭의사 앞마당이다.

숭의사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정실만 못 올라갈 뿐 양지바른 너른 앞마당이 동네아이들에게 활짝 열려있었다.

당시 적돌 아이들에겐 숭의사라는 간판보다는 ‘영당’이라는 이름이 친숙했다.
뜻을 모르는 아이들은 정문 한가운데 둥근원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임금이 내린 사당이라 자리를 맘대로 옮길 수 없고 오래오래 보존된다고 해서 길영(永자)를 써서 영당이라 불렀지" 가재남씨가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 였던 영당의 뜻을 풀어준다.

그는 숭의사 곁에서만 30년 넘게 살았다. 어디나 일 많고 탈 많은 종친회 총무자리를 13년째 맡았고, 현재는 소주가씨 종친회 부회장으로 있다.

하지만 그런 직함과 상관없이 제사가 있을 때면 으레 그의 부엌에서 음식이 나왔고 손님들을 위해 장롱 속 이부자리를 나르던 장본인이다.

가재남씨가 네 살 난 손녀 손을 잡고 사당으로 안내한다. 그의 손주는 소주가씨 20대손이다. 그들의 시조인 가유약, 가상, 가침 세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은 조선 철종임금이 정문과 사액을 내려 세운 것이다.

감실이 있는 정실안에는 시조 가유약의 초상화와 벼슬을 받은 선조들의 교지와 독립유공자, 훈장 등의 복사본도 함께 놓여있었다.

"저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수줍게 볼우물이 패인 손주는 대답대신 할아버지 등 뒤로 숨는다.

"그냥 그린 사람 정성을 봐선 걸어 놓은 것이지, 조상 곁에서 계속 일하다 보면 꿈에도 보이고 그려 그러니까 내가 저런 얼굴이 아니라 하는데..." 가재남씨는 후대에 놓인 초상화에 대해 이순신 장군과 같은 시대 인물을 2500년 전 인물처럼 그려 마땅치 않다고 평했다.

그림 속 주인공 가유약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의 장수였다. 그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일본과 싸우기 위해 남의나라 전쟁터에 왔고 결국 아들과 함께 부산에서 전사했다.

손자 가침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시신을 울산 땅에 묻고서 부모 곁을 지키기 위해 조선에 남았다. 훗날 안동권씨의 딸과 결혼한 가침의 자식들이 명나라로 돌아갈 요량으로 중국과 가까운 안흥항으로 왔다가 태안에 뿌리내린 것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선 고향에 달리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나라 잃은 그들을 품은 것이 태안이다. 그래서 태안 인근은 지금까지도 소주가씨의 중요한 집성촌이다.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에 남은 중국성씨들은 가씨외에도 영양천씨, 절강시씨, 절강편씨 등이 있다.

박기현씨의 책<우리역사를 바꾼 귀화성씨>는 가유약에 대해 명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을 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돌아가려 애쓰고 선물을 사양하는 등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가유약이 한반도에 드리워진 전운을 걱정하며 선조에게 "미리 도모하지 않으면 마치 7년의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걱정했던 기록이 전한다. 그는 결국 남의 나라전쟁터에서 아들과 함께 죽었다.

노장의 몸을 아끼지 않고 최전선에서 앞장서 싸운 결과다.

숭의사는 조선이 그 후손들에게 내린 감사의 선물인 셈이다. 숭의사 앞마당에 서니 문득 속리산 화양동에 남은 만동묘터가 생각났다.

가유약을 조선에 보냈던 명나라 황제의 사당이 있던 자리로 조선유학자들의 사대주의에 혀를 차게 만드는 곳이다.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돌계단은 옆 걸음으로야 겨우 오를 수 있는 데 황제를 모신 곳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좁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걸음걸이에서조차 사대를 강요하던 곳이다.

그것과 달리 가을 들판으로 활짝 열린 숭의사 뜰 안에선 누가 시끼지 않아도 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가유약의 자손들은 한반도의 새로운 씨앗을 일구고 산지 400여년이 조금 넘었다.

한국에 귀화한 성씨들을 연구한 박기현씨는 한반도가 에로부터 동북아의 망명기지였다고 설명한다.

현재 우리성씨의 26%가 귀화 성씨라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할 것은 순수혈통을 강조하며 남과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단일민족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연재해와 정치적난을 피해 한반도로 온 외국인들을 따스하게 품은 통 큰 친화력이라 역설하기도 한다.

농촌총각 배우자의 40%,전체인구의 2%가 외국인인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깊이 되새겨보아야 할 말이다.

그래서 숭의사는 단지 특정 성씨의 사당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벽을 허물고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귀화인들에게 베풀어야 할 ‘선물’로 읽힌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숭의사 소주가씨 시조를 모신 숭의사는 태안군 남면 양잠리 338번지에 있다.

1988년 8월 30일에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지정되면서 숭의사로 불리게 되었다.

본래 조선 철종2년 (1851년)에 가유약, 가상의 충성심과 가침의 효성을 기리기위한 이충일효(二忠一孝)의 불천지위(不遷之位)사우(祠宇)로 정문과 사당을 하사 받앗다.

사당의 정실(正室)안에는 가유약, 가상, 가침 세 사람의 신주를 모신 감실이 있다. 숭의사의 정문은 흰 원이 그려진 중문과 양쪽에 태극문양이 있는 동문과 서문이 함께 있는데 가운데 문에 그려진 원은 '충신과 열사의 상징으로 태양과 같이 뜨겁고 빛이 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사당의 가운데 문은 영혼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은 드나들 수 없고 제사에 쓰는 물건들만 통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동문(오른쪽)으로 들어가 서문으로 나와야 한다고 가재남씨는 자세히 설명했다.

소주가씨는 본래 중국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시조로 하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가유약의 후손들이 한반도에 뿌리내리면서 가씨의 중시조(中始祖: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을 뜻함)가 되었다.

숭의사를 찾아가려면 태안읍에서 남면방향 국도 77호선을 이용해 남면소재지에서 약 2-3Km지나면 왼쪽으로 양잠리 입구에 표지판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1.7km들어간다.

반응형